퍼포먼스 미술, 몸으로 말하는 예술 (플럭서스, 비토 아콘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퍼모먼스 미술이란?
퍼포먼스 미술은 1960년대 전후 현대미술의 급진적 전환 속에서 등장한 장르로,
예술을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가 아닌 ‘행위’와 ‘경험’으로 재정의했다.
그 뿌리는 1910년대 다다이즘과 미래주의의 반예술적 정신에서 비롯되며,
이후 상황주의, 하플닝, 개념미술과 맞물리며 예술의 물질성과 제도성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했다.
작가의 육체, 시간의 흐름, 관객의 존재가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되며, 예술과 삶, 작가와 관객, 예술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해체된다.
플럭서스는 퍼포먼스 미술의 초기 형태를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표적 흐름이다.
조지 마치우나스가 주도한 이 국제적 예술 네트워크는 행위 중심의 공연을 통해 전통 예술 개념을 전복하고자 했다.
1962년 독일에서 행해진 Piano Activities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신 해체하고 파괴함으로써,
음악과 악기의 신성함을 유쾌하게 해체한 사례다.
존 케이지의 무작위성과 침묵 개념에 영향을 받은 이 퍼포먼스는 예술이 반드시 아름답거나 완결되어야 한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비토 아콘치는 1970년대 초, 사회적 규범과 심리적 경계를 실험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Following Piece(1969)는 그가 무작위로 길거리의 낯선 이를 골라 일정 거리에서 따라가는 행위로 구성된다.
감시와 통제, 타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침입 등을 통해 현대 도시 사회의 불안한 인간관계를 드러내며, 행위 자체를 예술로 선언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신체와 정신, 고통과 지속성의 경계를 시험해온 작가다. Rhythm 0(1974)에서 그녀는 72개의 오브제를 테이블에 두고 6시간 동안 관객이 자신의 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의 행위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했고, 퍼포먼스는 인간 내면의 충동과 군중 심리를 드러내는 실험이 되었다. 관객의 행위가 곧 작품의 일부가 되는 구조는 퍼포먼스 미술의 본질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퍼포먼스 미술은 박제된 오브제가 아닌, 살아 있는 시간과 몸의 예술이다. 이 장르는 작품의 물질적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감각과 기억, 충돌과 질문을 통해 훨씬 더 깊은 예술적 체험을 제공한다. 예술이 삶을 반영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방식으로, 퍼포먼스는 오늘날까지도 경계 너머의 언어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