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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와 언러닝(unlearning), 내가 쌓은 과거가 변화의 자양분이 되는가

Celine Kang 2023. 4. 18. 09:59
 
힘차게 걷는 한 사람의 어깨에 누군가가 앉아 있다. 그 누군가의 어깨 위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그의 어깨 위에도 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조각품 끝이 천장에 닿을 때까지. 어깨 위에 앉은 이는 양손으로 아랫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다. 결국 맨 아랫사람은 눈을 가린 채 앞으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작가는 왜 이렇게 작품을 만든 걸까.

 

전시회의 주제인 ‘DNA:한국미술 어제와 오늘’과 관련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 전시회에서 수백 년 전 분청사기에 찍힌 점의 패턴을 현대화가 김환기의 점화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과거의 DNA는 오늘날 우리 안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과거가 없다면 오늘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어깨 위에 올라탄 과거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내 부모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내 부모는 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유산이다.

그러나 과거는 종종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과거에 얽매이면 그 과거는 감옥이 된다. 감옥에 갇히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 조선은 성리학의 감옥에 갇혀 나라가 망했다. 노키아는 피처폰의 감옥에 갇혀 스마트폰 세상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비로소 서도호의 작품 '카르마'를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깨에 올라선 이들은 지금 우리의 과거다. 과거에 과거가 차곡차곡 쌓이면서 지금 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과거가 없으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순백의 무지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카르마의 맨 아랫사람, 다시 말해 지금의 우리는 층층이 쌓인 과거를 어깨에 올린 채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는 종종 우리 눈을 가린다. 어깨에 올라앉은 이가 그 아랫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듯이 말이다. 과거 탓에 우리는 눈이 멀고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때때로 우리는 한자리에 머물러 빙빙 돌기만 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변하는데, 한자리에 머물면 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망한 나라들과 기업들, 개인이 어디 한 둘인가.

우리는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머릿속에 문득 '언러닝(Unlearn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배운 것을 지우는 것이다. 여백을 만드는 것이다. 그 여백에 새로운 것을 채우는 것이다. 과거 중에서 더 이상 본질로 기능할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족쇄가 돼 우리 눈을 가리는 것들은 지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길을 내디딜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움'이라는 것들 역시 과거가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내가 배워야 할 디지털 지식 역시, 다른 분야에서 오랫동안 개발되고 축적된 것이다. 그 지식이 신문 분야에 쓰이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야 그 지식이 신문업으로 옮겨와 이 산업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과거는 다양하다. 나를 만든 과거가 있고, 너를 만든 과거가 있다. 그와 그녀를 만든 과거도 있다. 나의 과거는 내 눈을 가릴 수 있지만, 당신의 과거는 내 눈을 열어줄 수 있다. 당신이 쌓은 과거의 지식은 내게 한없는 새로움을 줄 수 있다. 내 과거의 족쇄를 '언러닝'하고 새로운 배움으로 나를 이끌 수 있다. 너와 나의 과거가 연결될 때, 우리가 서로의 과거에서 무언가를 배울 때, 우리는 각자 새로운 현재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카르마, 즉 업(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