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윤형근(Yun Hyong-keun)의 작품 앞에 서 있으면, 관람객은 묘한 정적과 마주하게 된다.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메운 검푸른 남색과 흙빛 갈색, 두 가지 색만으로 반복된 수직 형태는 마치 오래된 절의 문 앞에 서 있는 듯한 평온함을 준다. 이 절제된 색과 형상 속에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 개인의 고통,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그래서 윤형근의 작품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색과 선으로 쓴 일종의 ‘영적 일기’에 가깝다.

격동의 시대와 예술가의 길

윤형근은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전쟁과 군사정권을 통과하며 예술가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사회적 혼란과 개인적 고통이었다. 1973년 군사정권의 비판적 인사로 지목돼 투옥된 경험은 그에게 세상과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든 계기였다. 그는 화려한 색채나 서구적 모더니즘의 기법보다 고요하고 절제된 색, 단순하지만 묵직한 형태를 통해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의 작품이 처음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였다. 한국 단색화(Dansaekhwa) 운동의 일원으로서 그는 박서보, 이우환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적 언어를 구축했지만, 그의 회화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더 단순하고 더 묵직했다.
하늘과 땅, 두 색의 철학
윤형근의 대표작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시리즈는 오직 두 가지 색만을 사용한다. 갈색은 땅(赭)을, 푸른빛은 하늘(靑)을 의미하며, 그는 “인간은 그 사이에서 산다”라고 말했다. 캔버스 위에 붓질이 중첩되면서 색이 스며들고, 마치 먹물이 번지듯 색의 농담이 깊이를 더한다.
또 다른 주요 연작인 〈Gate〉 시리즈는 수직의 두꺼운 직사각형이 화면 양옆에 서 있고, 가운데는 비어 있는 문(門)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이 문은 현실과 초월, 생과 사,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적 경계이자 통로로 해석된다.
동양 사유와 현대 추상의 결합
윤형근의 작품은 서구 미니멀리즘과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순한 형식 실험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색은 동양 수묵화의 번짐과도 닮아 있고, 반복되는 붓질과 절제된 화면 구성은 불교 선종(禪宗)의 고요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단순히 시각적 추상이 아니라, 동양 철학과 미학이 서구적 캔버스 위에서 재해석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작업 과정에서도 속도를 배제하고, 붓질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색을 쌓아 올렸다. 이 느리고 반복적인 행위는 일종의 명상과도 같았고, 그 과정 자체가 작가에게 정신적 수양이자 세계와의 대화였다.
단색화와 세계 미술사 속 윤형근
1970~80년대 한국 단색화 운동은 서구 모더니즘 미술과 달리 동양적 사유와 전통을 바탕으로 ‘비움’과 ‘여백’을 강조했다. 윤형근은 그중에서도 가장 절제된 색과 형태로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으며, 1990년대 이후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그의 전시가 이어지면서 국제 미술계의 재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2018년 베니스 포르투니 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은 윤형근을 한국 현대미술을 넘어 세계적 작가로 재조명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시에서 그의 작품은 한국적 정서와 보편적 현대미술 언어가 만나는 지점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침묵의 울림
윤형근의 작품은 설명을 거부한다. 그는 그림에 제목조차 붙이지 않거나 단순히 제작 연도와 재료만 적었고, 관람객이 화면 앞에서 스스로의 감각과 마주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의 전시장은 늘 고요했고, 그 고요 속에서 색과 선, 그리고 여백이 말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예술은 결국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화려한 서사 대신 절제된 형식과 색으로 응축한 시각적 철학이었다. 오늘날 윤형근의 작품은 여전히 현대미술 속에서 독특한 울림을 가지며, 관람객에게 묵묵히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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